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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해외

스페인의 역사 (2)

by 여행자로라 2023.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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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에는 종교적 관용 정책이 약화하여 종교적 탄압이 있었으며, 북쪽의 기독교 세력들은 13세기 초부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국토 회복 운동, 즉 레콘키스타라고 한다. 722년의 코바돈가 전투에서 기독교 군대의 승리는 스페인 북서부지방에 존속했던 기독교 국가인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만든다. 이슬람 군대들은 피레네 북쪽으로 옮겨가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지금의 프랑스 투르 근처에서 전투로 패하면서 두에로강과 에브로강과 함께 피레네 산지를 낀 현재 스페인 남쪽 지방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 전투를 투르 푸아티에 전투라고 부른다. 이슬람 군대는 당시 갈리시아를 수호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기록에 따르면 739명의 군대가 강제로 쫓겨났다. 나중에 프랑크족 세력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들 세력이 나뉘어 성장하게 된다. 

 

8세기부터 스페인을 통치한 아랍계와 베르베르족 후손 무어인의 알 안달루스는 주변의 토후국들과 경쟁하느라 기독교 세력이 커지는 걸 도와준다. 1085년 스페인의 중부 도시인 톨레도를 점령하면서 북쪽 지역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계속해서 국토 회복 운동이 남쪽으로 향했다. 이때까지는 종교적으로 극심한 탄압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몇 안 되는 모스크나 이슬람 사원만이 교회로 바뀌었다. 이미 무어인이 스페인 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무어인 고유의 문화는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 세력에게 코르도바 지역을 시작으로 1236년 스페인의 남서부 도시 세비야까지 내어준다. 1348년 무렵 스페인은 유럽 전체에 퍼진 흑사병으로 극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슬람 세력을 지원하던 마리니드 왕조는 13~14세기에 무슬림의 규약을 부활시키기 위해 재침공하지만 실패한다. 마리니드 왕조는 13세기 중엽부터 15세기까지 스페인 남부와 모로코를 통치하였다. 1469년 아라곤의 왕위 후계자 페르난도와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후계자 이사벨 1세의 결혼으로 공동 국왕이 지배하는 왕국이 성립됐다. 공동 왕국 출범 이후, 스페인은 1479년 북아프리카 서쪽 대서양에 있는 스페인령 군도인 카나리아 제도를 복속하고 1492년 무슬림의 마지막 보루이던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781년간의 스페인 내 무슬림 지배를 종식하고 통일을 이루었다.

 

1492년은 스페인에 있어서 여러 의미를 지니는 한 해였다. 이교도 세력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그리고 스페인 내 유대인 박해가 시작된다. 기독교의 한 종파인 로마 가톨릭 국가가 되기 위해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 심문 명분에 따라 무력으로 저항하는 다른 종교 신자들을 화형에 처하고 개종을 거부하는 유대교와 이슬람교도 신자를 죽이기에 이르렀다.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문화 혁신운동인 르네상스 시대의 신흥 군주로서 지위를 확립하면서 지역 귀족과 합세하여 왕족의 권위를 세운다. 이 과정에서 에스파냐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스페인 전체에 통합과 안정기가 찾아오면서 정치, 군사, 종교 등 전반에 발전하며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왕국의 통합은 스페인 제국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16세기와 17세기 대부분에 걸쳐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누렸으며 식민지 무역으로 쌓은 부를 누렸다. 스페인은 오스트리아 가문 중 가장 영향력 있던 가문 중 하나인 합스부르크 왕조 때에 이르러 최고의 영화를 쌓게 된다. 다만 이탈리아 전쟁, 네덜란드 17주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벌인 독립전쟁,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1588년에서 1604까지 영국과 스페인 간 전쟁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16세기에 카를로스 1세 때 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스페인 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별명을 얻게 돼 “스페인이 움직이면 전 세계가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있었다. 바닷길이 열리면서 유럽의 제국주의가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금, 은, 향신료, 농산물을 약탈하면서 스페인 항해자들은 유럽인에게 신세계를 소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대는 스페인의 개화기로서 지금은 스페인의 황금기로 칭송되고 있으나, 식민지인들에게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제하였고, 흑인 노예무역과 식민지 자원 수탈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한편 스페인은 전성기를 누리면서도 여러 많은 전쟁에 시달린다.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동남부, 북아프리카, 서아시아를 통치하던 오스만 제국의 급성장과 더불어 오스만과 손을 잡은 해적들이 지중해 연안 지방에는 침략행위와 노예 매매가 끊이지 않았다. 이슬람 세력에 의한 약탈도 빈번했으며,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탈리아반도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후에 로마 가톨릭 내 교회 개혁 문제로 스페인 전체가 분열하면서, 스페인은 한동안 종교 문제에 지속해서 군사 대응을 하기에 이르렀다. 수십 년간의 전쟁과 흉년 속에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여러 문제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는 유럽 전역에 퍼져 있던 문제에 개입하면서 사태를 악화시켜 국력 약화를 자초했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은 땅에 떨어진 합스부르크가의 위신을 세우려 노력했지만, 와중에 포르투갈이 독립을 쟁취하고, 네덜란드도 1648년 완전히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에는 유럽 전역에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신교를 비밀리에 지원하던 프랑스에 패배하였다. 당시 스페인의 영향력은 유럽 전역에 미치고 있었으므로 유럽 경제 또한 침체기를 겪었다. 그리하여 17세기 후반에 스페인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해외 영토를 유지하면서 영향력을 넓혀 식민지 통치를 19세기까지 계속하게 된다.

 

또 한 번의 문제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때 일어났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인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단절되었다. 그러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발생한 왕위 계승 전쟁은 귀족 세력뿐만 아니라 시민전쟁으로 번졌다.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방대한 영토를 내주면서 강국의 지위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5세의 왕위계승이 확정되면서 스페인에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다. 스페인은 18세기에는 다시 막대한 영토와 부를 토대로 회복기를 맞는다. 유럽 내 스페인의 지위도 향상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의 재도약 시작과 함께 상당수의 유럽 군주 또한 스페인의 발전에 귀 기울이게 됐다. 1763년에는 프랑스-인디언 전쟁에서 승리하여 미국의 서부에 있는 땅과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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